10대 독립운동가
소은명
유관순 열사와 함께 서대문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에서 옥중 만세 운동을 전개했던
독립운동가입니다.
1920년 3월 1일, 3·1 운동 1주년을 맞아
유관순 열사의 주도로 시작된 감옥 안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습니다
이 시위는 서대문형무소 전체로 퍼져나가
일제를 당혹게 했습니다.
만세 운동 이후 모진 고문과 고초를 겪었습니다.
성낙응
1919년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선생은 학생단의 간부로서
학생 시위를 기획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후 시내 행진이 시작되자 학생들을
이끌고 선두에서 만세를 외쳤습니다.
학교 담을 넘어 다른 학교 학생들과 연대하며
시위를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
3월 1일 단발성 시위에 그치지 않고,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앞에서 열린 대규모 학생
시위에도 참여하여 일제 경찰과 맞섰습니다.
시위 주동자로 지목되어 체포된 선생은
어린 나이에 당한 모진 고문과 수감 생활의
여파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1922년
향년 2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셨습니다.
3·1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 '유관순'
1919년 이화학당 학생 신분으로 서울에서
일어난 3·1 운동에 직접 참여했습니다.
일제의 휴교령으로 고향인 충남 천안으로
내려온 뒤, 인근 교회와 학교를 다니며 만세
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조직했습니다.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약 3,000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을 포함한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했습니다.
재판 과정에서 "나는 조국을 위해 만세를
불렀는데, 왜 남의 나라 사람이 나를
재판하느냐"며 일제의 재판권 자체를 부정하는
당당함을 보였습니다.
계속되는 모진 고문과 매질로 인한 후유증으로,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18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김세환
1919년 3·1 운동 계획 당시 학생단의 시위
참여를 독려하고 조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
서울뿐만 아니라 본인의 연고지인 수원과
충청도 지역의 기독교인 및 학생들을 동원하여
전국 곳곳에 독립의 소식을 전하고 시위를
조직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었습니다
최강윤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생
신분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3월 4일, 동료인 김종현(金宗鉉), 채순병 등과
함께 민중들의 만세 시위 참여를 독려하는
독립운동 취지문 400여 매를 직접 제작하여
배부했습니다. 이튿날인 3월 5일에도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남대문역(현 서울역) 광장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과 붉은 천(적포)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1919년 3월 9일, 시위 주동 혐의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성혜자
3·1 운동 1주년을 맞아 일어난 '배화학당 만세
시위'의 주역 중 한 명.
1920년 3월 1일 아침, 3·1 운동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배화학당 학생 40여 명과 함께
시위를 계획했습니다. 선생은 교우들과 함께
배화학당 뒷산(필운대)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쳤습니다.
만세 시위 직후 출동한 일제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박홍식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독립만세 시위에 학생단 일원으로
참여.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광장에서
수천 명의 학생 및 시민들과 함께 '조선독립'
이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격렬한 만세 시위를
주도.
안옥자
3·1 운동이 일어난 지 정확히 1년이 되던 날,
일제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교우들과 함께
시위를 기획했습니다.
학교 뒷산인 필운대에 올라가 약 40여 명의
전교생과 함께 목이 터져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만세 소리를 듣고 출동한 일제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이병희
의열단원이었던 숙부 이종암 선생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항일 의식이 남달랐습니다.
1930년대 초반, 종로 경찰서 습격 사건 등에
연루되어 체포되는 등 학생 신분으로 활동.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종연방직
(가네보 방직) 등에 위장 취업하여 노동자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노동 운동을 전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북경에서 친척이었던 시인 이육사(이원록)
선생의 독립운동을 도왔으며, 1944년 이육사
선생이 북경 감옥에서 순국했을 때 그의 유해를
수습하여 가족에게 전달한 인물.
북경에서 활동 중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광복 직전까지 옥고를 치르다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3.1절에 독립운동 하셨는데..
요즘 애들은 3.1절 길거리에 꽂아 놓은 국기를
빼서 저렇게 폭주족 놀이를 하고 있으니
한숨이 나오네요.
천안 거리에 태극기가 없어진 곳이
많은데 그 이유가 폭주족 놈들 때문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태극기를 훔쳐갔네요
폭주족 놀이가 끝나면 아무대나 태극기를
버리고 가요.
태극기 빼가지 말고 니들 돈으로 사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