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도 결혼도 포기했었는데
뭐 하나 잘난것없는 놈입니다
얼굴도 키도 직업도요
대학갈 머리도 안되고, 돈도 없어서 바로 돈벌기 시작했습니다
안 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남들 다 잘 때 일어나서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아둥바둥했습니다. 먹고 살려면 돈이 필요했습니다.
결혼도 연애도 다 포기하고 살았습니다
남의 집 귀한 딸 데려다가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 겨울이었습니다.
퇴근하고 서점에 들렀는데 그 아가씨를 처음 봤습니다
첫인상은 엄청 어려보였습니다 저보다 10살은 어려 보이더군요
그래서 그냥 아, 대학생 정도 되는 분이구나 햇습니다
하얀 털모자 하얀 후리스 하얀 바지 입고 있어서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데 피부가 더 하얗더군요 화장도 안한 것 같았는데
제가 그 옆에 가서 책을 집으니까 '앗 죄송합니다'하고 옆으로 물러났습니다
목소리가요. 어디 만화영화에나 나올 법한 목소리였습니다
당장이라도 데리고 가서 녹음 시켜서 티니핑에 내놔도 될 정도였습니다
눈 감고 목소리만 들으면 초등학생인 줄 알았을겁니다
첫인상은 그냥 하얗다, 귀엽다. 그게 끝이었습니다
제가 무슨 염치로 저런 어려 보이는 아가씨한테 말을 걸겠습니까
그 뒤로 그냥 꿈결에 본 것처럼 잊고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너무 고되었고 이렇게 살아 무엇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두 달 정도 지났을까요. 아직 겨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털모자. 하얀 털 모자를 봤습니다
점심 먹고 들어가는 길에, 카페에 앉아있더군요. 저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다가
홀린 듯이 카페로 들어갔습니다. 별로 가보지도 못했던 비싼 커피숍이었습니다
미친 척 하고 말을 걸어볼까. 그러다가 경찰에 신고하면 어떡하지 별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좋아했던 여자는 있어봤어도, 저를 좋다던 여자는 없었습니다.
불안하고, 무섭고. 그런데 말이라도 한 번 안 걸어 보면 후회할 것 같아서.
아니, 그냥 목소리가 한 번 더 듣고 싶었습니다.
"저기, 죄송한데..."
인생 최대의 용기였습니다. 살다살다 여자에게 말을 다 걸다니요.
제가 말을 거니까 눈이 댕그래져서는 저를 쳐다봅디다
저를 경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낯선 사람이라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지금 마시는 게 뭐니까..? 맛있어 보여서요."
병신새끼. 저거 오타 아닙니다. 진짜 혀가 꼬여서 저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딱 목소리 한 번 듣고 가자, 라고 생각했는데
"이거여??"
저거 오타 아닙니다22. 진짜 말투가 저랬습니다.
오프라인에서 이거요?가 아니고 이거여? 하고 말하는 사람 처음 봤습니다
그리고 물음표가 두 개나 붙은 것 같은 과한 리액션.
특이하다라고 생각햇습니다
여자분이 아무 대답도 안하고 저를 쳐다만 봤습니다.
아, 망했다 싶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저를 데리고 카운터로 갔습니다
그냥 무슨 커피다 하고 알려주면 되는 걸 왜 데려가나 했는데
메뉴판에 없는 거랍니다
바닐라 더블샷 아이스, 얼음 넣어서, 디카페인으로.
저거 외우는 데에도 오래 걸렸습니다
찐한 다방 커피 맛이었습니다
감사하다고. 벌벌 떨면서 계산을 하는데 싱글 웃으면서 저를 빤히 바라보더니
"저번에 저희 서점에서 보지 않았어여?"
여기서 봤다고 하면, 진짜 다 들통날 것 같아서 그런 적 없다고 거짓말 했습니다
귀가 홧홧한게 거울을 보지 않아도 빨갛겠구나 알 정도였습니다
고마우니까 케이크라도 사주겠다고 되도 안하는 소리를 해댔습니다
목소리만 듣자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욕심이 커졌습니다
번호. 휴대폰 번호. 제발 뭐라도. 머리는 지끈지끈거리고 심장은 쿵쾅대서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손은 벌벌 떨리고, 말은 제대로 안나오고.
"배불러여."
아, 그렇구나. 이건 거절의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살다보니 여자들이, 호감조차 없는 남자들한테는 무엇하나 얻어먹으려하지 않더라는걸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분이 '내일 사주세요'하고 말햇습니다
내일 어떻게? 우리는 서로 이름도 모르고 번호도 모르는데.
"저 맨날 여기 와요. 내일도 여기 있을게요."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습니다.
점심시간이 끝난 줄도 모르고, 멍하니 그 여자분이 시켜준 커피 들고 사무실로 돌아갔습니다
그 커피를 한 모금도 못 마셨습니다
마시면 내일 만나자던 약속이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그날 퇴근하고 부랴부랴 머리를 하러 갔습니다
깔끔하게 자르고, 면도도 열심히 하고, 냄새나진 않았으려나 샤워도 두 번 햇습니다
옷도 제일 깔끔한걸로 골라입었습니다
그렇게 다음날,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그 커피숍으로 뛰어갔습니다
정말 앉아있었습니다
책 한 권 들고요
나이, 나이부터 물어야 했습니다. 이름이랑.
너무 어리면 안되니까.
커피숍 문 열로 들어가니까
저 보고 베시시 웃는데, 아 미소가 예쁘다는 게 이런 말이구나를 처음 알았습니다
웃는 모습이 예쁘다기 보다는, 저만을 보고. 눈 앞에 저를 보고 웃어준다는 게.
어제 자기가 시켜준 메뉴가 맛있었냐고 묻길래,
한 모금도 못 마시고 여전히 사무실 책상 위에 있지만 맛있었다고 거짓말했습니다
귀도 다시 홧홧해지고 손도 떨리고 목소리도 떨렸습니다
"케이크 먹을거, 까요?"
이 아가씨 앞에만 서면 병신이 더 병신이 되었습니다
아가씨가 푸하하, 하고 소리 내서 웃는데 또 멍하니 쳐다만 봤습니다
크게 웃다 보니 뺨이 발그레 해지는데, 달달 떨면서 카드를 꺼냈습니다
근데 그 여자분이 케이크가 별로 안땡긴다고.
밥이 먹고 싶대요.
제 자신이 그렇게 자랑스러운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밥도 안 먹고 뛰어오길 잘했다. 스스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남자답게 '어디가 맛있으니 거기로 갑시다'라고 말도 못하고
여자들이 좋아하는거. 파스타 같은거? 그런거 먹으려나? 싶어서 따라가니까
돼지국밥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거는 그거대로 기분이 또 살짝 나빴습니다
내 주제에 무슨 기분이 나쁘나라는 생각도 들었는데
내가 그렇게 돈이 없어 보이나 싶었습니다
"국밥 좋아하세요? "
저야 음식 가리는 게 없다만은, 그 아가씨는 진짜 국밥 같은거 못 먹게 생겨가지고
혹시 저 사람이 나 때문에 싫어하는 음식 먹으러 왔나
오만생각이 다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일단 따라 들어갔습니다
돼지국밥 두 개 시켰습니다
이게 내 인생 첫 데이트 일지도 모르는데, 국밥이라니.
자괴감도 들고, 박탈감도 들고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아가씨가 그러더군요
여기 국밥이 진짜 맛있다고.
그 말 듣고 아, 나름 맛집에 데려온거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나 같은건 진짜 여자 만나면 안되겠다'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상대방은 '맛있는 집'에 나를 데려왔는데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저는 아가씨가 저를 배려한답시고 데려온 가게에서
혼자 온갖 생각을 다 했으니까요
그때 찬물을 확 끼얹은 것처럼 냉정해졌습니다
이건 아니다. 나는 이럴 그릇이 못된다.
국밥만 먹고 가자고 생각했습니다.
이름도 묻고 싶었고, 나이도 묻고 싶었고. 궁금한 게 많았는데 그러면 안될 것 같았습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국밥이 나오기만을 고요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아가씨가 먼저
"제가 마음에 드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눈도 못 마주쳤습니다.
마음에 듭니다. 알아가고 싶습니다. 이름이랑, 휴대폰 번호 좀 알려주세요.
싫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 말을 정말 똑부러지게 하고 싶었는데,
부끄러워서. 창피해서. 자격지심때문에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병신새끼라고 스스로 욕하기 바빴습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제 이름도 안알려주더니 대뜸
"저 30살이에요. 직장도 없고, 집안도 안좋고, 연애도 안 해봤어요."
진짜 대뜸 저랬습니다. 그제야 저는 고개를 들어 아가씨를 쳐다봤습니다.
어딜 봐서 서른 하나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랑 4살 적더군요.
지금 나이는 문제가 아니고, 연애 안해봤다는 말도 거짓말 같았습니다
평소 말투에도 애교가 철철 넘치는 여자가 연애를 왜 안한답니까
"그래서 저랑 만나봤자 득 될거 없으실거에요."
분명 득이라고 했습니다.
애같은 목소리로 제법 진지하게 말하더군요.
아가씨 말이, 제가 거짓말 못하고, 귀 빨개지고, 덜덜 떠는 게 귀여워 보였답니다
제가 아가씨한테 관심 있어 하는 것 같아서, 좋은 인연으로 밥이나 한 끼 하고 싶었답니다
저는 진짜 병신 같이.
밥만 먹고 나왔습니다. 밥 다 먹고 일어나기 전에, 아가씨가 화장실 다녀온다고 잠깐 자리 비웠고
저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빨리 나가고 싶었습니다
아가씨가 다시 돌아와서, 같이 나가는데
계산하려고 카운터에 가니까 가게 이모님이 '저기 여자 손님이 계산했어요'라고 하더군요
아니라고, 제가 현금 드릴테니 결제 취소 해달라고 하니까
아가씨가 나가자고 제 팔을 잡고 끌었습니다
비참했습니다.
내가 여자 밥 한 끼 못 사줄 것 같이 생겼나?
비싼 한우도 아닌데, 고작 몇 천원 하는 국밥인데?
들고 있던 현금을 아가씨 손에 쥐어주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손을 붙잡아야 하는데 그것도 못할 것 같았습니다
아가씨는, 이름도 하나 안알려주고
제가 돈을 못 줘서 안절부절하고 있으니까
본인이 나이도 많고, 직장도 없고, 돈도 없는데 그래도 아직 본인한테 관심 있으면
내일 케이크를 사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가씨는 국밥 먹고 먼저 갔고, 저는 그 다음날 카페를 안갔습니다
아가씨 나이든, 직업이든 그게 문제가 아니고
제가 진짜 뼛속까지 글러먹은 놈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남의집 귀한딸 고생시키지 말자.
그렇게 이름도 모르고, 나이랑 연애 경험이 없다는 것만 안 아가씨.
그 아가씨를 다시 만난 건 1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글로 한 번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문득 글이 길어졌습니다. 새벽이 되니까 사람이 이상해집니다.
스포 하나 하자면 현 와이프입니다.
지금 옆에 토끼 잠옷 입고 앉아서 귤 먹고 있습니다.
귤을 왜 저렇게 좋아하는지, 이번 명절 끝나면 귤 더 시켜줘야겠습니다
나중에 또 시간 나면 글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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